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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이야기들

쌍용자동차 체어맨 – 상편

by 유광재오일 2018. 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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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용자동차(이하 쌍용차)의 체어맨이 만 20년의 역사를 뒤로 하고 시장에서 물러 날 것으로 보인다. 지난 해 하반기부터 “체어맨W를 2017년 연말까지만 생산하고 2018년 3월에는 판매도 중단할 방침”이라는 쌍용차 관계자의 발언을 인용한 보도가 잇따르면서 체어맨의 단종은 기정사실로 굳혀지고 있다.



 

쌍용차 체어맨은 자동차 기업 쌍용자동차에게 있어서 여러 가지로 그 의미가 각별한 차다. 하동환 자동차연구소 시절부터 버스 등의 상용차와 SUV만을 만들어 왔던 쌍용차 역사 상 최초의 승용자동차이자, 본격적인 최고급 대형 세단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체어맨은 등장 당시부터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최고급 세단으로 오랫동안 사랑받아 왔다. 1997년 첫 등장 이래 20년을 이어 내려 온 최고급 세단, 체어맨의 일대기를 되짚어 본다.


메르세데스-벤츠 기술을 바탕으로 태어난 대한민국 최고급 세단

쌍용 체어맨은 1993년부터 프로젝트 ‘W카(혹은 W100)’로 개발을 시작, 약 4년 동안의 연구개발과 4,500억원의 비용을 투입하여 개발된 고급 대형 세단이다. 차명인 ‘체어맨(Chairman)’은 회의의 의장, 혹은 기업이나 위원회 등의 회장을 이른다.



 


 

체어맨의 개발은 당시 제휴관계에 있었던 獨 메르세데스-벤츠와의 공조를 통해 이루어졌다. 쌍용 체어맨은 당시 제휴관계에 있었던 獨 메르세데스-벤츠와의 기술제휴로 획득한 파워트레인과 각종 신기술들을 집적하여 완성되었다. 단순히 덩치만 큰 대형 세단이 아닌, 국내 자동차업계를 선도하는 진정한 의미의 최고급 대형 세단이었다.



 

체어맨의 기본적인 구조는 오늘날 메르세데스-벤츠 E-클래스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124시리즈(W124) 세단의 것을 바탕으로 했다. 파워트레인 역시 메르세데스-벤츠의 것을 가져왔다. 그러나 이 외의 다른 부분들은 ‘최고급 대형 세단’이라는 쌍용차의 확고한 개발 이념이 반영되어 만들어졌다. 트레드와 휠베이스를 늘려 차체의 크기를 키우는 한 편, 당시 메르세데스-벤츠에서 사용하고 있었던 첨단 장비를 적용하는 등, 본격적인 고급 세단의 면모를 유감 없이 갖춰 나갔다.


체어맨의 스타일은 메르세데스-벤츠의 W140 S클래스와 유사한 풍모를 지니게 되었다. 5미터를 넘는 전장과 더불어 당대 메르세데스-벤츠의 디자인 큐를 고의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물론, 당시 메르세데스-벤츠 승용차들의 스타일링은 직선적인 기조가 주를 이루었고, 체어맨은 곡선을 보다 적극적으로 사용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전체적인 차체의 형상과 비례는 물론, 차의 인상을 결정짓는 요소들이 대부분 메르세데스-벤츠의 것을 따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심지어 라디에이터 그릴, 헤드램프, 그리고 네거티브 엠보싱을 적용한 테일램프, 심지어는 메르세데스-벤츠의 외날 와이퍼를 그대로 채용하는 등, 디테일에서도 집요하게 메르세데스-벤츠의 디자인 큐를 따랐다.


파워트레인은 메르세데스-벤츠의 것을 그대로 사용했다. 엔진은 총 3종으로, 직렬 4기통 2.3리터 엔진과 직렬 6기통 2.8리터 및 3.2리터 DOHC 엔진을 준비했다. 2.3리터 엔진은 CM400(S), 2.8리터 엔진은 CM500(S), 3.2리터 엔진은 CM600(S) 트림에 각각 탑재되었다. 국내 시장에서는 4기통 엔진에 비해 6기통 엔진들의 인기가 더 좋았다.


그 뿐만이 아니다. 쌍용 체어맨은 전통적으로 안전을 중시해 왔던 메르세데스-벤츠의 차체 설계를 바탕으로 했기 때문에 국내 완성차 업계에서 최고 수준의 충돌 안전성을 지녔다. 체어맨은 국내 최초의 40% 오프셋 충돌 테스트를 통과한 차종이기도 하다. 또한 보쉬의 4채널 ABS와 트랙션 컨트롤 시스템(TCS)에, 전자제어식 서스펜션(ECS) 등, 당시로서는 시대를 앞서는 첨단 안전장비를 만재하고 있었다.


동양의 변방에 위치한 작은 자동차 회사에서 제작한 최고급 세단의 완성도는 메르세데스-벤츠의 개발진조차 놀라워했다. 하지만 이 놀라움은 우려로 바뀌기 시작했다. 메르세데스-벤츠는 체어맨이 수출될 경우 자사와의 경쟁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았고, 특히 체어맨의 가격경쟁력 때문에 자사의 시장을 빠르게 파고들게 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이에 메르세데스-벤츠는 쌍용차 측에 계약의 변경을 요구하게 된다. 이 요구안에는 체어맨의 대외 수출을 제한하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기술을 공유해 주었던 메르세데스-벤츠가 체어맨을 잠재적인 경쟁상대로 인식해버린 것이다. 이에 따라 체어맨은 내수시장에서만 판매할 수 있게 되었다.


체어맨의 수출길이 막힌 쌍용차는 어떻게든 체어맨을 내수시장에서 반드시 성공시켜야만 했다. 이에 쌍용자동차는 무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자신들에게 기술을 전수해 준 메르세데스-벤츠의 이름을 빌리기로 했다. 티저 광고를 통해 쌍용그룹이 야심차게 개발한 최고급 대형 세단의 출시를 알리면서 메르세데스-벤츠의 혈통을 수혈 받았다는 것을 내세웠다. 또한 메르세데스-벤츠의 기술제휴 과정에서 까다롭기로 소문난 그들의 테스트를 모두 통과했다는 점을 강조하며, ‘안국 최고의 名車’라는 슬로건을 내세웠다.


체어맨이라는 이름도 이 과정에서 지어지게 되었다. 장엄함, 혹은 위엄을 의미하는 그랜저(Granduer), 왕조를 뜻하는 다이너스티(Dynasty), 대규모 사업 내지는 기업을 의미하는 엔터프라이즈(Enterprise) 등, 당시 국내 고급 세단들의 이름은 차 자체를 강조하기 위한 작명이 보편적이었다. 하지만 체어맨은 달랐다. 차 자체의 품격이 아닌, 차에 타는 ‘사람’을 더 강조함으로써 세상을 이끄는 ‘리더’의 품격을 어필했다.



 

이렇게 완성된 체어맨은 1997년 9월에 열린 97년도 프랑크푸르트 모터쇼에서 그 모습을 처음으로 드러냈다. 체어맨의 공개는 김석준 당시 쌍용자동차 회장이 직접 참석하여 진행했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 국내에서도 신차발표회를 갖고 시판에 돌입했다.



 

그리고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당시 쌍용차는 체어맨의 연간 판매 목표량을 약 2천대 가량으로 잡고 있었으나 개시 하루 만에 1천대를 넘는 계약을 따낸 것이다. 계약 물량의 대부분이 5,850만원에 달하는 최고급 사양 모델이었고 리무진 모델의 계약 대수도 130여대에 달했다. 일 년치 목표량의 절반을 하루 만에 일궈 낸 셈이었다.


체어맨의 등장은 기존에 고급세단을 판매하고 있었던 기업들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특히 현대자동차는 체어맨의 광고 문구에 사용된 “국내 최고 출력”과 “최고 연비”라는 표현이 과장되었다며 공정거래위원회 시정 대상이라는 입장을 나타낸 것이다. 공정위는 대형차 제조사들 간의 과열경쟁에 대한 조사에 착수하였고, 쌍용차는 공정위가 요구한 자료를 제출했으며, 이를 모두 공개했다. 그리고 공정위는 쌍용차에 제재를 가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 사건 이후로 체어맨에 대한 신뢰는 더 높아지는 결과가 되었다.


물론 체어맨은 우수한 자동차이기는 하지만, 흠결이 아예 없었던 차는 아니었다. 메르세데스-벤츠의 기술력이 녹아 들어 있는 차는 맞지만, 세세한 부분에서 품질에 대한 불만이 나왔다. 고가의 고급 승용차는 품질에 대한 기대감이 높기 마련인데, 쌍용 체어맨은 이 부분에서 다소 부족한 측면이 있었다. 체어맨을 구입한 소비자들은 실내의 내장재가 쉽게 마모되는 것을 주로 지적했다. 또한 당시 일본식의 정숙한 세단을 선호했던 소비자들은 소음에 대한 기준이 상대적으로 관대한 독일식의 설계도 문제 삼기도 했다.


최악의 위기 속에서 피어난 꽃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으로 독일 세단을 선호하는 고급 자동차 시장의 경향 덕분에 체어맨에 대한 호평은 계속되었다. 시판 개시일부터 열띤 호응을 받았던 체어맨은 쌍용차의 희망이었다. 하지만 그 희망적인 분위기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1997년 당시는 한보철강을 시작으로 대형 기업들이 줄줄이 부도가 나면서 한국 경제의 위기를 알리고 있었던 시기였고, 그 해 11월은 대한민국 정부가 IMF에 구제금융을 공식 신청하며 내수 경기는 극도로 얼어 붙게 된다. 한국 전쟁 이후 대한민국이 맞은 최대의 국난(國難), 외환 위기가 닥쳐 온 것이다.


이 때 쌍용차는 그야말로 폭풍에 휘말리게 된다. 쌍용차는 체어맨을 개발하면서 막대한 자금을 쏟아 부었고, 그 때문에 97년부터 줄곧 자금난에 시달리고 있었다. 여기에 외환위기까지 겹치면서 쌍용자동차는 대우그룹에 매각되어, 대우자동차의 일부가 된다. 당시 쌍용차의 부채는 3조 4천억원에 달했다. 이는 쌍용자동차의 자기자본인 3천억원을 11배나 웃도는 수치였다.



 

이 때부터 체어맨은 쌍용 체어맨이 아닌, ‘대우 체어맨’으로 판매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당시 대우자동차를 상징하는 3분할 그릴이 체어맨에게도 달리게 되었다. 대우자동차의 3분할 라디에이터 그릴이 쌍용자동차의 상징과도 같은 체어맨에 붙게 된다는 것은 쌍용차에게도, 체어맨의 소비자에게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 때문에 ‘대우 체어맨’을 구입하고도 쌍용자동차 시절의 구형 라디에이터 그릴로 바꿔 다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대우의 이름을 달게 된 것이 꼭 나쁜 결과만을 가져온 것은 아니었다. 체어맨은 대우자동차로 인수된 이후에 오히려 판매량이 더 증가하기 시작했다. 쌍용 시절 출시한 첫 해, 약 1천 대 이상의 판매고를 올린 체어맨은 98년에 2,911대, 99년에는 4,570대를 판매하며 해마다 성장을 거듭했다.


이는 당시 모회사였던 대우자동차의 영업망 덕분이라고 볼 수 있다. 당시 쌍용자동차는 전국 150여개에 불과했으나, 대우자동차의 영업망은 그 5배를 넘는 전국 760여개소의 영업망을 보유하고 있었다. 기존 영업망에 대우자동차의 네트워크가 추가되면서 체어맨의 판로가 더욱 넓어지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이는 내수뿐만 아니라 수출 시장에서도 마찬가지로 작용했다. 97년 이후, IMF 체제라는 최악의 고난 속에서도 체어맨은 그 꽃을 피우고 있었다. 이 때 체어맨은 대한민국 대형 세단 시장의 70%를 점유하고 있었다.


 모토야